남자에게는 한 살 많은 누님이 있었다.
그 누님은 세 살 되던 해에 소아마비라는 병에 걸렸다. 이 땅에 전쟁 끝나고 채 10년도 안 된 환경인지라 그 병에 대한 무지함은 물론이고 기초적인 방역이나 예방에 대한 국가 차원의 그 무엇도 아예 없거나 미비한 상태였으리라. 실제로 그즈음 전국적으로 소아마비가 창궐하여 수많은 환자를 양산 했지만, 그 병에 대한 상식이나 정보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갸날프게 어린 딸이 고열에 며칠을 시달린 뒤에 무릅 아래 한쪽 다리가 휘어져 버렸으니 젊고 무지한 부모에게는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전쟁 끝난 지 10년도 안 된 강원도 전방이니 빈약한 군 병원 말고는 변변한 일반병원 하나 없던 산골에서 말이다. 전방의 직업군인이라 젊은 아내 혼자 아픈 딸과 젖먹이 아들까지 등쳐 업고 도시의 병원을 오랫동안 전전했었지만, 뒤틀어진 딸의 다리는 다시 회복되지 못했다. 훗날 누님은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수많은 수술과 시술과 처방을 시도했지만 결과는 늘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누님은 어릴 적 얼굴도 이쁘게 생겼지만(당시 사진을 봐도) 무척 영민했다. 실제로 IQ 검사를 했는데 131이었다. 그랬으니 첫아들을 기다리던 집안의 딸이었지만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 했을 것이다. 그토록 이쁘고 사랑스럽던 딸이 병에 걸려 잘 걷지 못하고 절룩거리는 모습을 보는 부모는 가슴이 찢어졌으리라. 특히 모친은 어린 딸의 모진 고통을 지켜보며 왜 내 딸이 소아마비에 걸려야만 했는지 자책했다고 한다.
물론 어린 딸은 병에 걸리기 전에도 비교적 허약한 반면, 한 살 터울로 태어난 동생은 유아 때부터 덩치 큰 사내아이였다고 한다. 모친이 수유할 때면 딸, 아들을 번갈아 먹이는데, 어린 아들을 먼저 먹이고 다음에 딸을 먹게 하는데 모친이 잠깐 졸기라도 할라치면 힘센 아들 녀석이 딸을 밀치고 누님 몫까지 뺏어 먹더란다. 이랬으니 어린 아이가 내가 낳은 새끼지만 얼마나 원망스럽고 미웠겠는가... 모친은 그럴 때면 미운 아들놈을 밀쳐내고 여린 딸에게 먹이곤 했음은 훗날 토로하셨다..
딸의 모진 병은 결국 딸의 허약함에서 기인했고, 또 그 허약함은 한참 젖을 먹고 왕성하게 성장해야 할 시기에 동생이 생겨, 결국 충분한 성장이 어렵게 되고 본의 아니게 허약해 졌으니, 딸이 겪는 저 고통의 원인이 "아들 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어찌해도 안 되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무기력, 통제감, 상실의 고통, 그리고 괴로움의 결과로 그런 결론을 했으리라.그땐 그런 마음으로 살았노라고 훗날 당신 친정 식구에게 말씀하셨다고 들었다.
남자가 궁금한 게 또 있다. 오래된 사진첩에 자신의 국민학교 입학식 때 할머니 손을 잡고 찍은 사진이 있더란다. 사진을 볼 때마다 왜 부모님과 찍은 사진은 없고 할머니와 찍은 것만 있을까? 했단다. 또 소풍가면 남들은 엄마들이 따라 왔는데 왜 나는 할머니가 오셨을까 했다. 안타깝게도 할머니도 부모님도 모두 돌아가신 비교적 최근에야 그 이유를 늙으신 고모님께 물었더니 "너는 그때 시골에서 조부모님들과 살았고, 부모님은 누님과 어린 동생들 데리고 부친 근무지에서 살았다"라고 하셨다.
남자는 그때야 정리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누님의 치료를 위해 전국의 용하다는 병원이나 한약방을 전전해야 하는 부모님과 함께 살지 못하고, 부친의 고향인 시골에 보내져 조부모님들과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남자는 국민학교 입학 당시 부진한 발육상태를 보였는데, 심지어 일상적인 대화도 부족할 정도였으니 무엇보다 모친과의 애착 형성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 짐작된다.
물론 부친이 전역하시고 가족이 고향으로 이주하던 때인 남자가 국민학교 2학년 중반부터는 함께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국민교육헌장"을 술술 외워야만 하교할 수 있던 1969년도 국민학교 6학년 여름방학 때 부친은 운명하셨다. 그러니까 부친과는 한 3년 정도 함께 살았겠다. 당시엔 학교에서의 가정조사를 하면 꼭 편부, 편모 이런 것에 동그라미 표시를 해야 했다. 부모가 사고나 병을 얻어 안 계실 수도 있을 것이고, 이혼이나 여타의 이유가 발생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특히 당시에는 남편이 일찍 죽으면 아내가 무슨 죄인이라도 되는 양 취급했던 시절이었다. 초상을 치르고 여름방학이 끝난 뒤 개학했더니 친하던 친구들이 하나둘 거리를 두거나 멀리하더란다. 한 참 뒤 그 친구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엄마"들이 "그 애하고는 이제 놀지 말라"고 하더란다. 이전까지 모범생이자 우등생이던 초등학교 6학년 남자는 이후 학교도 세상도 싫어졌다.. 부친의 부재로 비교적 많은 전답과 시부모와 다섯 어린 자식까지 챙겨야 했던 모친은 강해져야만 했을 것이다. 집안을 이끌어야 했고 이런저런 장사도 하려면 사람들을 만나야 했는데 그들 대부분 남자들 아니었겠는가? 또 그들과 대화할 때 찡그리거나 슬픈 표정으로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감수성의 시기인 어린 아들의 눈에는 모든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결국 모친이 부정한 여인으로 보였다. 그래서 부끄러웠다. 그때부터 남자는 항상 고개를 숙이고 다니는 습관이 생겼단다. 훗날 동창들은 기억하기로 "늘 교모를 꾹 눌러 쓴 말 없는 동급생"으로 기억한다.
남자는 건축가가 되고 싶었다. 그 와중에 도시의 유망한 공고에 지망해서 어찌어찌해서 합격했다. 아니 합격의 마지막 관문인 합격자 대상 신체검사를 하는 날이었다. 학교 체육관에 줄 맞춰 기다리다 순서 되면 앞으로 나가 사지 멀쩡한가를 확인받는데 거기엔 색약검사도 있었다. 이전에는 해 본 적 없던 색맹검사 책자를 넘기는 선생님 앞에서 숫자를 읽어 내려가는데 어떤 숫자들은 안 보였다. 전혀 알 수 없는...
검사하던 선생님도 안쓰러웠는지 "잘 봐봐! 이게 왜 안 보이냐?" 했지만 안 보였단다. 뭔가 보이긴 보였는데 숫자를 변별 할 수 없었겠지. 순간 넓디넓은 체육관의 모든 시선은 긴장과 초조로 초죽음 된 어린 남자에게 날라왔다. 순간 아들의 합격을 확신하여 한복 곱게 입고 동행해 가족석에서 지켜보던 모친은 한걸음에 달려와 다그치셨다.
"왜 이게 안 보여? 왜 안 보여?" 안 보이는 내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인데 무정한 모친은 등짝을 때린다.
남자는 후기로 인문계에 진학했다. 당시 학생운동의 주역은 고등학생이었다. 물론 서울 등지엔 대학생들이 주축이었겠지만 남자가 거주하던 도시에는 그랬다. 남자는 어리버리하던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선생님들로부터 생소한 민족이니, 정의니, 민주니 하는 개념, 이제까지의 교육과는 다른 확연히 다른 세상과 조우했다. 그리고 세상의 모습을 보는 다른 눈이 생겼다. 아니 눈 뿐만 아니라 귀와 그리고 마음이 생겼다. 가치관과 개념도 바뀌었다.
그 덕에 학생운동을 했다. 열심히, 정말 가열차게...하숙집 어귀에는 늘 형사들이 고등학교 2학년 남자를 잡으러 와 있었다.물론 원하는 대학에 떨어졌다. 재수해서 공부하면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다고 믿었다. 해서 모친께 말씀드렸지만, 단호히 거절하셨다.
성적에 맞춰 지방대학 가라!...그럴 수 없었다. 불행히도 형사는 교도소 갈래? 군대 갈래? 했다. 결국 당시 가장 빠르게 지원해서 갈 수 있는 그곳에 지원해서 입대했다. 하필이면 가장 힘든 곳으로...그렇게 어찌어찌해서 남자는 군대를 다녀온 뒤에 "집안을 지켜야 한다"는 모친의 말씀에 곧 취직했다. 천행으로 정말 하느님이 가상히 여겨 좋은 여자 만나 아들딸 낳고 지금껏 기냥 산다.
그렇게 남자는 한 번도 거절하지 못하고 단 한 번도 거역하지 못하고 산 세월이었다. 어떻게 해 볼 도리 조차도 없었다. 남자에겐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그냥 해야만 해서 했을 뿐이다. 그러기에 자신의 감정이나 욕구 이런 것들은 쓰짤데기없는 사치였다. 그 남자에겐 큰 아들로서의 어쩌지 못하는 책임감과 애정없는 모친과의 관계에서 외줄타기를 해야 했다. 이런 걸 "양가감정"이라 하는가.
하지만 남자가 지금도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따로 있다. 모친과의 "부족했던 애착"이다.
어릴 적부터 모친이 운명하실 때까지의 긴 세월 동안 자신을 향해 환히 웃는 모습의 모친은 기를 써도 기억에 없다. 왜 엄마가 자신이 낳은 어린 아들을 보고 웃지 않았겠는가만 남자의 기억엔 그런 모친의 모습은 없다. 모친은 몸이 아픈 누님에게 온 관심과 애정을 써야만 했겠지만 어린 아들은 엄마의 애정을 갈망하고 욕구했을 것이다. 어린 아이는 부모와 떨어져 조부모님과 살아야만 하는 당면한 현실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나 좀 봐주세요! 나 좀 제발 봐주시라니까요!"라고 말이다.
모친은 모친대로 늘 고분고분하지 않은 아들, 별것도 없으면서 손아귀에 안 들어오는 아들이 미웠으리라. 아들 댕기는 직장까지도 "권력이 별로 없다"는 이유로 하찮히보셨다. 오로지 늘 이래라! 저래라! 며 지시하고 요구하고 야단치던 모친이 있을 뿐이다. 심지어 시골의 가난한 집 딸이라고 아들의 아내이자 며느리까지 무시하고 함부로 했으니까. 결혼하고 처자식 생기자 남자가 겪어야 하는 고통은 배가 되었고, 그 아내에게도 동일한 수난이 적용되었다.
남자는 선택해야 했다. 이렇게 살다가는 처자식마저 잃어버릴 수 있다는 생각에 긴 세월 모친을 향해 애정을 갈구하던 것을 멈췄다. 그 뒤로는 말 그대로 의무적 행위만 했다.물론 형제자매들의 심한 거부반응과 그에 따른 여러 부작용도 감수해야만 했다. 그렇게 내려놓고도 남자는 내려놓은 마음을 스스로 알지 못했다그냥 잊어버리는 게 상수라고 생각했을까?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그런 마음을 스스로 알고 충분히 이해하고, 자신의 내면 마음의 그것을 인정하고 이제 정리해야 하는 것을 그저 잊고 있으면, 묻어 두고 있으면 다~ 잘 되는 줄 알았다.
남자는 그래서 아쉽다. 지금보다는 마음 편히 세상을 살지 않았을까? 아내에게 툭 하면 화를 내고 조그만 싫은 소리에도 버럭하는 이런 편협하고 오그라진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더라면, 이 맑고 좋은 세상을 보다 환히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다만, 그때 애착이 정상적으로 형성되었더라면 그가 겪을 더한 고통이나 역경이 지금 처럼의 상처와 애환으로 기억되지 않았으리라. 세상의 그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애착 말이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죄송하다. 남자의 아픔과 고통의 상처를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으니...
그리고 남자 자신에게도 그저 미안할 뿐이다.
'그냥 내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그놈이 죽었다. (0) | 2021.11.24 |
|---|---|
| 분노. 불안. 그리고 화 (0) | 2021.10.04 |
| 더운 날씨와 올림픽과 언론 (0) | 2021.08.06 |
| 부인. 억압 (0) | 2021.07.21 |
| 기억 (0) | 2021.0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