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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朴가신
그냥 내 이야기

기억

by 박가신 2021. 7. 14.

메케한 최루탄의 흔적이 가시지 않던 5.18 다음 해.

예비군 신분이 되어 내려간 고향에는 뭔가 생소한 비릿함 그리고 어긋난 듯한 뭔가 자라고 있었다. 그 중심에 민정당이 있었고 우리 옆집에 살던 친구 부친이 이 지역 책임자였다. "군수도 맨 날 와서 인사 한다!"던 그 분께서는 뒷날 선출직 수장도 역임하셨고, 친구와 그 동생들은 모두 큰 도시의 직장인이 되었다.

40년도 더 지난 이야기다. 나는 그저 그런 직장인이었다. 속칭 끗발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해서 하루 온 종일 아니 한 달 내내 딱히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는 그런 곳 말이다. 그렇지만 정보과 형사는 직장에 날마다 방문했었다. 당시엔 간첩도 많았으니 무척 바빴을 터인데 말이다. 늘 한결같은 시간에, 한결같은 말투에, 그리고 한결같은 눈매로 사무실에 등장하면 우릴 쭈욱 훌터보던 분이었다. 늘 검은 가죽 수첩에 우리가 전날 행했던 주요 업무와 민원 사항, 시행 중인 사업에 대해 꼼꼼하게 기록했다. 조목 조목... 그 분께 설명하는 걸 지켜보며 "우리에게는 별거 아닌 것도 국가에서는 정보로 여기구나" 했다.

그분의 수고에 마음을 담아 매달 점심값 하시라고, 명절에는 고향 가실 때 노자돈 하시라고 자그마한 봉투도 전달했다. 그분도 우리도 기쁜 마음으로, 결코 불쾌하거나 억울한 심정이라고 는 1도 없는 정말이지 우호적 관계였지 싶다. 물론 그 시절 이야기다.

또 다른 분도 생각난다. 자주 오는 분이 아니어서 우리 같은 아랫 것들은 그 분에 대해 잘 몰랐다. 대부분 우리들은 무시하고 책임자 방으로 직행하여 대부분의 방문 시간을 그들과 보냈기에 말이다. 물론 그 분께도 점심값 하시라고 적지 않은 봉투가 제공되었다. 자주는 아니고 1년에 두어 차례 정도였지만 그분의 방문은 우리 직장의 분위기는 충분히 삭막하게 만들곤 했다. 우리 들이 뭔가를 아주 잘했다는, 잘하고 있다는 칭찬 일색의 기사를 실어 주시겠다는 (어쩌면 정말 감사한 일이며 특별히 먼저 부탁하거나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분명한 호의적 제안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다만 그것이 "광고료"라는 우리로서는 무리한 지출이 칭찬의 댓가로 수반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분은 "기자"였다. 그땐 그랬지만 요즘엔 아니겠지.

동네 반상회 때 나타나서는 "민정당 찍어야 나라가 산다"라던 눈깔 큰 공무원은 지금 어디서 잘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분도 처자식과 먹고살려고 그랬으리라. 수많은 양민들을 죽이고 희대의 반란 정권이 뭣이 좋다고 그 짓을 했겠는가? 아무려면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양심을 속이는 부끄러운 삶을 살았다고 자각한다면 반성하는 자세로 살아야 할 것 아닌가. 그도 그들도 말이다. 반란의 수괴가 그러하니 닮아가는지, 아니면 세상이 바뀌어 사람 사는 세상이 되니 무서울 게 없어서인지 모르지만, 요즘 보면 목불인견이다. 물 만난 고기들처럼 의도적 오류에, 왜곡에, 편향을 반복하는 그들을 본다.

날도 더우니 열 올리지 말고 살려 다짐 해 본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염치"의 사전적 의미이다.

염치없는 족속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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