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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朴가신
그냥 내 이야기

풀칫재

by 박가신 2020. 1. 6.

과거에는 젊은 사람이 세상을 뜨면 "선영"으로 곧장 들어가지 못하고, 일정기간 다른 곳에 묻혀있어야만 하는 풍속이 있었던 모양이다.

죽어서도 예절을 지켰어야 했을까?

하여간 내 부친께서는 당신나이 42살이시던 1969년도 한 여름에 운명하셨다.

내가 국민학교 6학년, 9살 차이던 막내동생이 4살, 모친께서는 36살...그랬다.


이 땅의 온 백성들이 스스로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음을 늦게나마 자각해야했던 바로 그 해다. 

나와 친구들은 당연히 수업이 끝나면 그 헌장을 너댓번 큰 소리로 암송했다. 일단 자각해야 하니까....

그러고는 한 사람씩 앞으로 나가 "외운 놈은 집에 가고, 못 외운 놈은 외울 때까지" 계속 외워야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암기능력이 떨어질 뿐 아니라, 순간 대처능력도 부족한 탓에 분명히 혼자 외울 때는

가능했는데, 일단 선생님 앞에만 서면 후둘거려 남들보다 빨리 집에 간 기억이 거의 없지 싶다.


각설하고,

초하룻날과 보름날이면 새벽에 상복을 차려입고 산소엘 가야했다.

명칭은 잊어버렸는데 상중이었기 때문이고, 나중에 탈상이라는 절차 후 상복을 모아 태웠던 기억이 난다.

철 없는 국민학생이라 밖에서 놀다 들어와서 모친께서 말씀도 없으시고 떡이나 제수용 반찬들을 준비하시는 걸 보고서야  "아~ 내일이 그 날이구나" 눈치를 까고, 저녁 모친 목욕소리 들으며 얌전히 잠자리에 들곤 했다.

새벽에 모친께서 제수용품을 챙기시는 소리에, 한 살위 누님부터 4살 짜리 막내까지 주섬주섬 상복과 주렁을 들고, 새벽 버스를 타야 했다.



강진가는 완행버스를 타고 묘소까지 한 2~30분 정도 가면 "풀칫재"라는 고개가 나온다.

영암 학송리에서 강진 성전 월남리로 이어지는 고개로 지금은 터널이 두개나 뚫어져 휭~ 하고 지난는 길이다.

강진,해남,완도 등 전라도 남쪽으로 갈 때 반드시 거치는 고개의 왼쪽엔 활성산, 오른쪽엔 월출산으로 연결되는 고갯길로 6.25 동란때 수많은 인민군과 빨치산과 그리고 우리 군경들이 죽어간 기막힌 고개다. 

한 쪽은 지리산 줄기를 타고내려와 마지막 서해안에서 북으로 가는 배를 타려고 고개을 넘어야 했고,

또 한 쪽은 그것을 어떻게든 막아내려던 사람들이 무수히 죽어갔던 곳이다.

오래 전 조부님은 풀칫재서 죽은 자들의 시신과 피가 계곡을 다 채웠었노라고 하셨다.



하여간 그 풀칫재의 정상 계곡 그늘진 곳, 이 숲 속에 부친 묘소가 있었다.

풀칫재 정상에서 내려 산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했는데, 문제는 비가 왔거나 겨울에 눈이라도 오면 옷이 젖는 정도가 아니라 엄청나게 춥다는 것이다. 변변하게 우산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그래도 어린 동생들 누구도 징징거리거나 떼를 썼다는 기억은 없다.

(글을 쓰다보니 어렸던 동생들이 짠하다...)


진짜 문제는 올 때다.

갈 때는 집 앞이 경찰서라 완행버스 잡기가 쉬운데, 올 때는 버스 타기가 어려웠다.

새벽 즈음 깊은 산속에서 상복입은 어린애들과 여성을 위해 차 세울 운전사가 없다는 뜻이다.

해서 살길을 터벅거리며 내려 오다가 세워주면 타고, 아니면 상당한 길을 걸어야만 했다.

또 운이 좋아 차를 타도 정류소에서 내려 집에 오다보면, 학교가는 친구들을 보게 되는데 괜히 부끄럽고

창피하고 그랬던 기억이다.

(뭣이 부끄럽다고 생각했는지 이제는 내가 부끄럽다)


불현듯 그 기억이 나서 그 곳을 다녀왔다.

물론 부친은 거기서 몇년 계시다가 곧 선영으로 모셨고, 다시 공원묘지로 모셨기에 그 계곡에는 따로  갈 일도 없어 가 본지 사십년도 훌쩍 넘을 듯 싶다.

이제는 수풀이 우거져 부친 계시던 자리는 찾기 어려웠지만 그 골짜기는 그대로이다.

막상 가보니 기억처럼 가파르거나 우람한 계곡도 아니었다.


부친의 살과 피와 뼈의 기를 먹고 자란 풀과 나무와 그리고 숲이 있을 뿐이다.

지난 50여년의 과거와 미래의 세월이 있을 뿐이다.


*원래 "풀칫재"라 했는데 지금의 공식명칭은 "불티재"라고 한단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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