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엔 "활성산"이름의 산이 있다.
아마 백두대간의 정기가 지리산으로 이어져 내려온 듯 이제 나이들어 보니 가까이 할수록 듬직한 모습이다.
우리 동네서 대충 이십리 길의 활성산을 넘어 십리 정도 더 가면 "한대리"라는 작고 소박한 마을이 있다.
어릴적 그 활성산 정상 부근에 우리 선산이 있었다.
부친께서 운명하시고 나서는 조부님께서 "산소 잃어버린다~"시며 명절이나 제삿날, 그리고 벌초하는 날이면 당시 중학생이던 나를 반드시 데리고 다니셨고 , 그 이전에는 물론 부친 손에 이끌려 가파른 산길을 다니는 것이 여간 힘들고 괴롭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부친께서는 꼭 성묘를 마치고는 함께 오신 조부님을 비롯한 다른 친척들과 함께 동네로 돌아가시는게 아니라 반대편 방향으로 한 참을 가야하는 동네 "한대리"를 가셨는데 그때마다 어린 나를 꼭 데리고 다니셨다.
평소완 달리 모친께서도 별 말씀 안하시며 부친을 따르도록 했셨는데, 어린 그 때만 해도 약주드신 부친을
나만 따라가는 것이 우선 두렵고, 산길을 돌아올 일도 무서웠지만 거역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내가 국민학교 6학년시절 운명하셨고 그전 1~2년 투병하셨으니 아마 내가 5학년 되기 전까지도 그랬지 싶다.
하여간 부친과 내가 한대리의 어느 친척집을 오후 늦게 방문해서는 밤 늦도록 약주를 드신 부친을 부축해서
그 야밤에 활성산을 넘는 장장 삼십리길을 걸어 돌아 오곤 했다.
(당시 부친께서는 180 가까이 되신 거구셨다)
그때만 해도 택시도 없었고, 한대리앞을 지나가는 어떠한 대중교통도 없었으니 오직 걷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댁을 방문해서 내가 "삼촌"이라고 호칭하는 분과 부친께서 약주를 드실 때는, 꼭 눈물을 흘리신다거나 괴로운 표정들이라는 점이 당시 어린 내가 봐도 영~ 이상했지만 물어볼 상황이 아니었다.
이유는 한 참 뒤에 알게 되었다.
부친께서는 육군 중위 때 결혼하셨다.
신부는 21살 처녀였는데 얼마나 미모가 뛰어났던지 사람들이 말 하기를 혼례가 있던 그해에 인근 3개 군 신부 중에서 "가장 잘난 신부"였으며, 착한 심성에 효성 또한 가득했다고 훗날 여러 어르신들로부터 내가 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분은 다음 해에 출산 후유증으로 인해 그만 출산 3일후 돌아가셨다고 한다.
태어난 아기(아들이었다고 함) 또한 보름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요즘이면 그렇게 세상을 떠날 일도 아닌데 말이다.
그 분의 친정집 동네가 "한대리"였다.
부친께서는 훗날 새 장가를 가셔서 나와 우리 오남매를 두셨지만, 자주 오실수 없는 과거의 처갓집을 찾아
커가는 큰 아이를 인사시키고 과거의 손위 처남과 눈물의 술잔을 비우셨던 것이다.
그리고는 그 밤에 어린 아들 손을 잡고 삼십리 길을 우시다가 군가를 부르시다가 또 우시다가 그러셨다.
당신 스스로도 몇 년 뒤 세상을 뜨셨다.
물론 활성산에 계시던 조상님들은 오래 전 가까운 공원묘역으로 모셨기에 다시는 활성산에 갈 일은 없어졌고 내가 부친을 따라 걷던 그 능선에는 이제 풍력발전기만 부~웅 부~웅 거리며 돌고 있다.
그 분, 나로서는 큰어머니께서는 이후 부친과 합장하여 늦게나마 연을 이어가신다.
다행스럽게 내 친어머니의 넓으신 아량 덕분이시다.
그 밤 눈물바람의 산길을 걸으셨을 부친을 추억하며 나는 눈물이 난다.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그토록 사랑하셨을 어머니들께도 사랑한다는, 감히 보고 싶다는 말씀을 엎드려 올린다.
"잘 계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