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전화로 말했다.
기왕 올라오시면 저희와 하룻밤 주무시고 가시라고...
해서 손녀와 놀 마음에 못이기는 척하고 경기도 화성 어딘가의 숙소에서 하루를 더 보내고 내려왔다.
밤 늦게 도착하기도 했고 워낙 피곤해서 몰랐는데 아침에 의외의 장면에 정말 놀랐다.
늦잠 자느라 식당시간에 늦게 내려갔는데도 불구하고 식당 앞에 줄을 지어 있었고 식당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거의 대부분 젊은 부부와 아이들과 함께 가족 단위로 아무리 둘러봐도 우리 부부보다 더 나이들어 보이거나
심지어 비슷한 사람도 찾을 수 없다.
코로나19가 주로 나이먹은 사람을 잡아간다니 나이먹은 사람들은 바깥 출입을 안하는 모양이다.
해서 죽음을 생각한다.
농담 아니라 육십 넘으면 언제든 자연사를 해도 부끄럽지 않는 나이라고 생각한다.
육십대 중반이 되어가고 있으니 마음 같아서는 기왕 죽을 거 정신 멀짱할 때 죽는 것도 과히 나쁘지 않을 듯 하다.
솔직히 말해 지금까지의 삶이 다소라도 사회에 공헌하거나 유익한 존재였다면, 이제는 갈수록 사회 공동체나 또 누군가의 배려나 희생을 수반되는 요구하는 삶이어야 하니 말이다.
신이 주신 고귀한 삶을 굳이 생산성이나 능력 따위로 치부하자는 뜻은 아니다.
그저 성향상 구차하게 살기 싫을 뿐이다.
또 말이다.
지금보다 더 나이들면 또 마음이 변할 지 모르니 장담할 일은 아니지만, 솔직히 말 해서 내가 다소 일찍 죽는다고
크게 안타까워하거나 망연자실 할 일도 없을 것이고, 더더욱 목 놓아 슬퍼하거나 식음을 전폐할 상황도 아니지 싶다.
물론 차자식들이나 형제자매들은 그 동안의 정리나 애정으로 하루이틀 애통해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그것 아닌가.
적지 않은 세월동안 초상집에 다녀본 경험상 대성통곡하는 누군가의 처자식이나 가족을 접한 기억이 없으니 말이다.
산 사람은 또 살아야 한다~는 자위의 말들을 하겠지.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의 삶이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어린 나이에, 너무나도 어린 아이의 죽음들은 가슴이 애린다.
내 아이가 아니라도 말이다.
오늘 저녁 그렇게 죽은 이 땅의 모든 어린 영혼들을 위해 기도드린다.
"하느님! 사랑하는 하느님!
연옥의 못다핀 어린 아이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가슴 아픈 그 아이들을 당신의 사랑의 품으로 감싸주소서.
다시 어린 아이를 데려가실 때는 부디 살 만큼 산 저를 대신 데려 가소서.
간청하는 제 마음 늘 흔들리지 않도록 저에게 용기주시고, 그래서 좋은 일 한번 하고 이 세상 하직할 기회를 주옵소서.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