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니 눈이 왔다.
이 눈이 이번 겨울 마지막 눈이겠지 싶어 서둘렀다.
송정역에서 부산행 무궁화호.
오늘은 순천역까지 이동하는 2시간 10분짜리 기차여행.
날씨는 영하 4도 였지만 바람이 강해 체감온도는 훨씬 낮을 듯, 눈은 계속 내린다.

기차는 정확히 오전 10:30분에 출발.
광주지역을 천천히 벗어나 "화순"을 거쳐 "능주역"에 이른다.

내가 아는 능주는 "정암 조광조의 유배지"라는 것이 유일하다.
역에서도 가깝다.
십수년 전 지독하게 존경하던 그 분이 돌연 세상을 떠나자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고 헤매던 나머지,
더 훨씬 오래 전 곧은 세상, 이상적 사회를 꿈꾸다가 오백년전 그러니까 1519년 그 날.
사약을 들어야만 했던 그 분을 추념한 "적려유허비"의 그 시골집을 내내 서성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능주 남정리 174.
다소 과격하고 급진적인 인물.
유신정치, 도학정치, 성리학적 유자 이상정치.
곧은 사람. 그러다가 부러진 표본적인 삶으로 묘사된 그 분이 유배된지 한 달만에 사약을 받고 돌아가신 곳이다.
한양에서 가져온 사약을 들이켰지만 멀쩡한 젊은 38세 그 분을, 서둘러 나졸들이 목을 조으려하자 고함을 내지르고
스스로 방에 있던 "소주"를 들이켜 절명한 자갈밭 마당 그 자리에는 지금 "애우당"이라는 사당이 세워져 있다.
당시 그 분을 죽여야만 한다는 기성세력이자 기득권들인 남곤, 심정 등등을 미워하지 않는다.
언제나 어디서나 누가든 반대 세력은 존재하는 법이니...
나는 오직 "중종"이라는 임금을 비난할 뿐이다.
세상을 개혁하고 조정의 권위를 세울 때는 그를 총애했지만, 결국 국왕 자신이 개혁의 대상이 되자 그를 버렸다.
배를 띄웠던 물이 세월이 지나 세상이 바뀌자 배를 버렸다는 말이다.
비난할려치면 배 띄운 물을 향해야지 괜시리 물에 떠다니는 잡풀들 들먹일 것 없다.
기차는 "명봉역"에 멈춘다.
보성군 노동면에 위치한다.
전쟁 시절 오직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드높은 산들과 계곡들 즐비한 교통 열악한 동네다.
조정래 어르신의 "태백산맥"을 걷다보면 앞으로 지나갈 보성, 득량, 벌교 등지에서 벌어졌던 전설을 접할 수 있다.
오지게 찰지고 거친 오리지널 전라도 쌩욕은 팁으로 말이다.

"보성역"과 "득량역"이 이어진다.
득량역사 입구에 적힌 인삿말이 정겹다.
"어서오시오!"
(괜히 아랫사람에게 하대하는 느낌이랄까?)


보성을 지나면 득량, 득량 지나면 예당, 그 다음에 벌교에 이른다.
고흥반도 북서쪽의 넒은 간석지가 전개되는 득량은 논농사 중 특히 "보리농사"가 많은 지역이다.
늦여름 청녹색의 보리밭은 가히 환상적이다.
지금은 두 분 모두 돌아 가셨지만 처가가 있던 고흥 대서는 여기서 가깝다.

늦은 점심은 순천에서 했다.
굳이 비싼 음식점 갈 것 없이, 순천시청 앞에 가면 정갈하고 맛난 백반집 많다.
밥먹고 천천히 걸다보면 공원처럼 꾸며놓은 소박한 도심을 만날 수 있다.
크고 넒은 것, 화려하고 빛나는 것만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기차는 비교적 천천히 달린다.
시골 장터를 연결하는 완행버스처럼 승무원들도 친절했다.
승용차나 버스 보다는 이런 산골과 계곡을 사는 주민들의 편익을 위해 기차길을 유지하는 것은 효율성이나 수익성 같은치졸한 잣대를 들이대는 건 아닌 듯 하다.
우리 모두 돌아 갈 시골 하나 쯤은 남겨 둬야 하지않을까.
국민정신건강을 위해 말이다.
* 정신건강을 위한 나의 아내 사진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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